시대를 앞서간 창작가, 강석희의 팔십세를 기념하여 - 서정은

(음악학자, 서울대학교 교수)

“항상 작곡에 임할 나의 느낌은 음악과는 관계없는 어떤 동떨어진 적막한 상황에서 처음부터 출발한다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서서히 어떤 테마를 놓고 집중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상상한 적도 없는 어떤 공간 속에 빠져든다. 형상화할 없는 어떤 형체와의 대결이랄까.

나는 우선 하나의 공간구조를 설정해 나간다. 이것은 기초적인 어떤 음악적 선입관과 관계가 없다. 내가 구축하려는 형체가 어느 정도 결정되면 이때부터 소리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다음부터는 작품에서 사용될 모든 음악적 재료들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소리를 어떻게 것인가부터 사용될 악기에 관해서도 처음부터 원점으로 돌아가서 악기의 기능을 연구한다. 마치 설계도를 그리듯이 작곡을 해나간다.”

- 강석희 저 『나는 음악을 설계하는 작곡가』 중에서


작곡가 자신이 묘사하는 창작의 과정은 추상적이면서 공간적이다. 무정형의 소리예술인 음악을 본질적 성격대로 접근하는 한편, 시간예술인 음악을 공간적 관점으로 그려간다. “음악을 구축하는 가장 작은 요소인 ‘음’은 이상이나 이하의 의미를 갖지 않는 순수한 소리 자체”라는 자신의 말과 같이 철저한 형식주의적 입장을 표명하는 한편, 음의 추상성에 공간의 구체성을 입히는 것으로 작곡의 과정을 시작한다.

1934년 출생으로서 지금과 비교할 없이 척박했던 문화적•음악적 환경에서 성장한 강석희의 음악적 사고는 마치 유럽의 오랜 클래식전통을 지내온 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고를 지향하던 20세기 중후반의 서구작곡가만큼 진보적이고 다면적이다. 동시대의 한국작곡가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그의 이러한 음악관 또는 창작관은 그의 생애를 잠시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삶의 주요흔적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특별한 재능을 보여 음악의 길을 걷게 되는 여느 작곡가들과 달리, 강석희가 기억하는 그의 어린 시절은 음악보다는 문학과 그림에 흥미를 느꼈던 소년이었다. 학교나 교회에서의 음악경험을 통해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언뜻언뜻 느끼긴 했으나 별다른 관심 없이 음악을 즐겨 듣지도 공부하지도 않았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작곡과 입시에 응시하게 되고, 1955년 서울대 작곡과에 입학하게 된다. 동기생이었던 백병동, 송해섭, 이강숙 등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식견에 적잖이 놀란 그는 1년간 낙원동의 ‘르네상스’라는 음악다방에서 집중적으로 클래식음악을 들으면서 뒤늦은 공부를 해나간다.

그러나 강석희의 음악적 상상력과 창작력, 그리고 그가 음악에서 느끼는 흥미는 이미 다른 토양에서 자라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학시절이던 1950년대 중후반은 국내 음악정보가 매우 열악한 환경이어서 일본의 예술관련 잡지를 통해 빈약한 정보를 얻는 전부였는데, 당시 일본의 젊은 작곡가 마유즈미 도시로의 <니르바나>라는 현대적 작품을 듣게 강석희는 일본 작곡가가 이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무렵 한국의 기성 작곡가들은 대부분 조성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어법을 사용하며 후기낭만주의 정도의 음향을 구사하고 있었고, 극소수의 작곡가들이 12음기법을 시도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미 새로운 음향과 어법을 탐색하는데 관심이 컸던 강석희는 1966년 한국 최초의 전자음악인 <원색의 향연>(The Feast of Id)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작품목록의 곡으로 전자음악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그것도 1960년대 한국에서-그의 이후 행보를 어느 정도 가늠케 하는 가지 실마리라 하겠다.

비록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없는 열악한 장비를 통해서였겠지만, 전자음악 작업을 시도한 강석희는 이를 통해 음악의 다양한 파라미터-음색, 리듬, 음역, 지속시간, 다이내믹 등-를 논리적으로 다루는 사고를 익히게 되었고, 이는 이후 그가 작품의 논리성이라는 측면을 중시하게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전자매체의 이점인 다양한 음고 구사의 가능성을 통해 평균율이 아닌 다른 음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는 음악의 중점이 선율이 아닌 구조에 있다는 생각, 따라서 철저한 구조를 갖춰야 음악미를 갖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곡가 강석희의 일생에 걸친 음악관이라고 있는 “음악은 보이지 않는 건축”이라는 경구는 이미 그의 젊은 시절부터 형성되어온 가치관을 나타내준다.

그의 음악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했던 시점은 1968년 동베를린 사건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수감 중이었던 윤이상을 만났던 때였다. 세계 유수음악가들의 구명운동 속에 병보석으로 입원 중이던 윤이상을 만난 강석희는 약 1년간 정기적으로 그를 찾아가 레슨을 받는 한편, 그가 유럽 체류 고민했던 문제들, 한국과 서양 사이에서의 음악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해 마침내 독자적 세계를 구현하기까지의 고된 과정을 생생히 듣게 된다. 이같은 간접 경험을 통해 강석희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정립하게 된다(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윤이상은 당시 유럽현대음악계의 동향과 창작의 정신 등에 대해 의미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한국에서의 현대음악제 개최를 강석희에게 권유하게 된다. 이에 영향을 받은 그는 1969년 <서울 현대음악 비엔날레>를 개최하게 되고, 이는 후 <범음악제>(Pan Music Festival)로 명칭이 바뀌어 1992년까지 강석희의 기획 예술감독 아래 한국의 현대음악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음악제로 자리하게 된다.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한국관의 초청작곡가로서 <원음>, <예불>, <생성69> 등을 발표한 직후 독일로 떠난 그는 1975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과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윤이상, 보리스 블라허에게 작곡을,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프리츠 빙켈에게 전자음악을 공부하던 유학기간동안 이후 그의 음악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번의 전환점을 맞는다. 관현악곡 <카테나>(Catena, 1975)는 독일유학시절의 음악적 성과를 보여주는 마지막 작품이면서, 이후 그의 창작세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모태와 같은 작품이 된다.

귀국 후 1976년 10월 베를린 메타음악제(Meta Music Festival)로부터 동-서양을 잇는 작품을 위촉받게 되면서-<예불>, <농> 이후로-다시 한국적 음악을 소재로 택하게 되는데, 이때 작곡된 인성과 플루트, 클라리넷, 피아노, 2명의 타악기주자를 위한 <부루>(1976)는 그의 초기대표작 하나로 기록된다.

1980-81년 베를린 DAAD의 예술가 프로그램 초청으로 다시 독일에 체류하게 강석희는 베를린 공대 스튜디오에서 계속해서 작업하면서 전자음악에 다시 몰두하여 <모자이코>(Mosaico, 1981), <향흔>(Klangspuren, 1981), <항변>(Mutatio Perpetua, 1982), <아니리 2>(1983), <인벤치오>(Inventio, 1984), 오토바이 소리만 사용한 구체음악 <오디세이>(Odyssee, 1984>, 라디오음악극 <펜테질레아>(Penthesilea, 1985) 전자매체를 사용하는 다양한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만들어낸다.

후 1982-99년까지 서울대 작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학생들을 작곡가로 길러내는 한편 끊임없이 작품을 창작했고, 동시에 <범음악제> 외에도 베를린의 실험음악제 <인벤치오넨>(Inventionen)의 공동주관(1982-85년), <서울-베를린 페스티벌> 주관(1994-97년),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부회장 역임(1984-90년) 등의 활동으로 한국 창작음악계의 활성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도 작곡가와 음악제 주관자로서의 활동은 꾸준히 이어져서, 2005년 이후 현재까지 <아츠페스티벌 디멘션>(Arts Festival Dimension)을 이끌면서 여전히 창작을 병행해오고 있다.

음악세계

순수기악음악, 칸타타, 오페라, 전통국악의 소재를 사용한 음악, 전자음악, 컴퓨터음악, 음악극, 필름과 전자음향을 위한 대단히 다양한 장르와 성격의 작품목록을 형성하는 강석희의 음악세계는 중요한 가지 특징을 지닌다. 그리고 특징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다양한 장르와 매체의 작품들을 관통하여 그의 음악세계 전반을 묶어주는 핵심적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그의 특징은 앞서 짧게 언급한바, 음악을 주관적 감성이나 감흥에 의해서가 아니라 ‘논리’와 ‘지성’을 통해 접근하려는 태도다. 이는 그가 글이나 인터뷰를 통해서 여러 차례 공언된 것으로, 그는 작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음을 구축하는 것”이며 “냉철한 이성과 이를 바탕으로 논리가 요구되는 세계”로서, 작곡가는 “모든 소리들을 철저히 지적으로 컨트롤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언뜻 보면 작곡가라기보다 과학자나 공학자의 말과 같이 들리나, 이러한 태도는 사실상 그만의 독특한 음악관은 아니다.

서양음악사를 돌아볼 때, 작곡가들이 이처럼 글로 표현하지는 않았어도 작품을 통해 뛰어난 음악적 논리와 구축의 미를 드러내는 예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글로 써내기 시작한 본격적인 시대인 20세기의 작곡가 중에는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음악에 대한 사고와 강석희의 관점이 놀랍도록 닮아 있음을 보게 된다.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시대를 지나 신고전주의로의 전환의 이유를 ‘반(反)표현미학’으로 설명한다.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이 추구하던 주요 미개념인 표현미학 또는 감정미학을 거부하고, ‘절대음악’적인 고전주의의 미(美)이상을 목표로 삼았던 그의 말은 위에 인용한 강석희의 글만큼이나 극단적으로 보인다.

“작곡은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술이 더욱 통제되고 제한될수록 예술은 더욱 자유로워진다.” “예술작품의 완성을 위해서는 작곡가를 자극하고 움직이게 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요소가 다스려져야 한다. 훈련되어야 한다. 푸가는 좋은 예이다. 완전한 형태의 푸가를 위해서는 작곡가가 규칙에 예속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음악은 시간 속에 나타나는 질서(order)다.” “음악은 감정의 표현도, 감정의 상징도 아니다.” “음악은 음재료의 결합 속에 존재한다.”

이것이 과연 <봄의 제전>의 작곡가가 글이 맞는가 당혹스러울 만큼의 냉철함을 보여주는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으로부터 음악 외의 다른 것ㅡ기쁨, 슬픔, 고통 등의 감정유발, 자연에의 환희, 나아가 무미건조한 인생을 잊기 위한 자극제 등ㅡ을 찾으려는 것에 부정적 견해를 보이면서, 음악은 그것이 청취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생각이나 감정과 완전히 무관한, 고유의 자율적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조금 앞선 시대의 비평가의 글에서 뿌리를 찾을 있다.

음악의 자율성(autonomy of music)을 주창한 한슬릭(E. Hanslick, 1825-1904)의 유명한 말, “음악의 내용은 울리며 움직이는 형식이다”는 당시에나 후대에나 음악을 만드는 자와 음악을 듣는 자들의 수많은 논평을 불러왔는데, 약 1세기 후의 한국작곡가인 강석희는 한슬릭의 음악관과 핵심적인 내용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제가 정열적 효과를 내는 원인은 작곡가의 과도한 고통이 아니라 증음정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작곡가의 영혼의 떨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팀파니의 트레몰로에 의한 것이다. 작곡가의 그리움으로부터가 아니라 반음계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라는 한슬릭의 말은, 어떤 이들에게는 음악을 느끼지 못하고 분석의 메스만 들이대는 냉혈한의 글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모호하고 설명 되는 감정의 산물 같았던 음악과 효과에 대한 명료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 물론 후자에 해당하는 강석희는 한슬릭과 같은 비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작곡가이기에, 이러한 그의 음악관은 그의 주요작품들을 관통하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독일유학시절의 마지막 작품 <카테나>(1975)는 위와 같은 사고를 음악화하기 시작한 곡으로, 이후 그가 추구하는 음악세계는 다양한 장르와 소재에 걸쳐있으면서도 자신의 어법을 찾은 1970년대 중반이후 현재까지 어느 정도 일관된 지향점을 보인다.

관현악곡 <카테나>는 ‘사슬’을 뜻하는 제목답게 60개의 다양한 단편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전체를 이룬다. 다양한 악기편성, 길이, 음역, 다이내믹, 템포를 특징으로 하는 단편들이 하나의 구조물 속에 균형을 갖고 전개된다. <모자이코>, <항변>(Mutatio Perpetua)도 작품의 연속선상에서 작곡되었으며, 나아가 <인벤치오>, <환영>(Mosaicum Visio), <연쇄반응>(Chain Reaction), <보르텍스>(Vortex)에도 영향을 준만큼 <카테나>는 강석희의 전체 작품목록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곡이라 하겠다. 물론 <예불>, <농>, <부루> 등 1960-70년대 작품들도 초기 대표작들로서 그의 음악세계의 축을 담당하고 있으나, 1980년 이후의 주요경향은 <카테나>로부터 비롯된다고 있다.

<카테나> 이후 대부분의 작품들은 위에서 언급한바 ‘연속적 전개과정’을 통한 논리성을 추구하여,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에 의한 음악적 결과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그의 음악관을 보여준다. 그런데 시기 작품들에는 다른 특징이 발견된다. 그것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화려하게 반짝이는 금속성 음향이다. 이것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배음열의 고차배음과도 어느 정도 연관되는데, 중간음역 이상의 고음역 그리고 금속 타악기들(대부분의 이디오폰)의 배합을 통해 그가 선호하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소리”를 산출하는 것을 있다.

그가 이러한 음향을 좋아하게 것에는 어려서부터 관심을 가졌던 우주에 대한 생각과도 연관된다고 작곡가 스스로 말한다. 별들의 소리, 우주의 소리라고 나름대로 상상했던 것이 그러한 금속성 음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계기는 1980년 작품인 <청동시대>라고 있다. 쾰른 WDR 방송국의 위촉으로 작곡된 곡은 명의 타악기주자(징, 탐탐, 공…)와 전자음향을 위한 편성으로, 강석희는 <청동시대> 작곡에 앞서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을 방문해 중국 송-원-명-청 시대의 온갖 청동기에서 나는 다양한 소리들을 듣고 깊이 매료되었다고 한다. 깊고 낮은 소리부터 높고 현란한 소리까지의 환상적 경험은 이후 빛나는 금속성 음향에 대한 추구의 원천이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작곡가들이 특별한 음향이나 음색에 집착했던 예는 사실 많이 있다. 신고전주의 시기의 스트라빈스키는 특히 목관악기에 대한 애착을 보였는데, 목관악기를 위한 「8중주」(Octet, 1922-23)에 대한 설명에서 자신의 이러한 선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악기의 유연함이 연주자의 개인적 감수성을 나타내기에 좋은 반면, 목관의 음색은 형식의 엄정함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목관악기들 사이의 양감적 차이는 음악적 건축미를 명확히 해준다.” 역시 명확성과 건축적 형식미를 중시하는 신고전주의적 경향에 바탕한 악기취향임을 보게 된다.

에드가 바레즈 역시 관악기에 대한 특별한 애정과 함께 현악기는 기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렇듯 자신의 고유한 음악적 사고에 기반한 특정악기군에 대한 선호의 경향을 강석희에서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작곡가에게나 자신이 선호하는 악기 또는 음색이 있을 있으나, 강석희에게 있어 특정음향에 대한 선호는 선호를 넘어 ‘추구’에 가깝다고 있을 정도다. 위에서 말한 화려한 금속성 음향을 그는 비단 타악기뿐 아니라 현이나 관, 건반악기를 통해서도 즐겨 구사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강석희 음악의 특징은 ‘한국적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다. 앞서 언급했듯 그의 초기작품들 가운데는 한국전통의 음악적 요소(<농>, <예불>, <부루> 등) 또는 설화적 요소(만파식적 이야기에서 발상을 얻은 <만파> 등)를 다룬 작품들이 적지 않고, 곡들이 그의 주요작품들로서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강석희는 이러한 한국전통적 요소를 다룸에 있어서도 특정 역사나 문화의 맥락으로부터 요소들을 추상화하여 중립적인 작곡재료로서 사용한다. 국악기의 농현을 분석하여 음악적 재료로 사용한 <농>에서도, 만파식적 전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만파>에서도,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음악의 논리적 구성과 새로움이었다. 농악의 리듬요소를 도입한 피아노와 전자음악을 위한 <인벤치오>(1984-85), 베를린 필의 12첼리스트를 위한 곡으로 위촉시 한국적 성격의 요구에 따라 역시 농악의 빠른 리듬을 사용한 <놀이>(1990)에서도, 그는 자신이 “한국적 음악을 쓰겠다는 의식보다는 추상적, 절대적 음악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이로써 그는 한국 또는 동양문화에 대한 소속감이나 지향성을 거의 갖지 않으며, 그보다는 ‘인류보편적’ 가치에 주된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잃어버린 원형의 회귀와 이를 바탕으로 영원한 미래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비단 한국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그의 작품 중국이나 그리스 등으로부터 소재를 가져온 경우에 대해서도, 자신의 음악세계에 있어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삼으려는 의식”의 반영이라고 말하는 그는 분명히 인류보편적 사고를 추구하는 작곡가며, 그대로 시대를 앞선 글로벌 예술가였다.

*****

강석희가 작곡가로서 창작해온 작품세계에 있어서나, 국내외 굵직한 현대음악제의 기획가이자 예술감독으로서 기여한 한국 현대음악 현장의 질적•양적 상승 국제화에 있어서, 한국의 현대음악사를 총괄해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손꼽게 된다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음악세계나 작품양식에 대한 호오(好惡)와 무관하게, 대부분의 이들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현대 한국음악사-국내 ‘현대음악’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한국음악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획을 그은 인물의 하나라는 데에 이견이 있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이은 미군정, 6.25 전쟁, 오랜 군부독재 등으로 인해 문화적 정체성이 극단적으로 혼란스럽고 초라했던 20세기 중후반에 이미, 시대와 사회의 한계를 종횡으로 뛰어넘었던 그의 족적을 돌아보면 놀라울 지경이다. 한국의 음악인, 중에서도 한국의 문화적 배경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작곡가’라는 직업을 가진 자로서 강석희는 음악계뿐 아니라 예술계를 총망라해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던, 실로 독보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그가 작곡가로 성장하고 자리 잡아 당시 한국의 음악적 상황-창가 중심의 일제강점기와 서양의 찬송가 단순한 조성음악을 통해 서양음악을 접했던 시기를 지나,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선율 중심의 사고에 바탕해 작업을 하던, 또한 일본이나 미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음악도 대부분 낭만주의정도까지였고 현대음악 정보는 극히 드물었던 시대-을 고려할 그의 음악적 사고는 서양현대음악사의 세대 정도를 뛰어넘은 듯해 보인다. 조성체계를 유지하던 후기낭만주의에서 20세기 중반(예컨대 다름슈타트 악파)으로 바로 뛰어넘은 같은 사고의 도약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선율적 특징과 심리•감정의 표현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20세기 무조성 시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1950년 전후의 음악적 사고와 어법으로 넘어간 듯하다. (물론 작품의 음향 자체가 시기의 유럽음악과 유사하지는 않다. 음악에 접근하는 ‘사고’의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말하는 “음악을 설계하는” 작곡가라는 표현은 스스로에 대한 매우 적확한 수식이라 하겠다.

사회, 경제, 문화 모든 측면에서 유럽에서의 한국의 인지도가 매우 낮던 1970-80년대에 서양음악의 전통 현대의 중심지인 독일을 중심으로 작곡가로서 인정받으며 국제음악제와 유명연주자들의 끊임없는 위촉 속에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쳤다는 것, 국제음악제를 공동주관하고 주요 국제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는 자체로도 당시 강석희의 음악가로서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있다. 21세기, 이른바 글로벌 시대라는 현재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 아닌가. 전성기의 범음악제, 메타 음악제(Meta Musik Festival), 국제현대음악제(ISCM)를 오랜 기간 단독 또는 공동으로 이끌었던 탁월한 조직가로서의 능력과 동시에, 국내의 어떤 작곡가들보다도 창조적인 작품들로 계속해서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은 작곡가와 기획가라는 방향에서 그의 능력을 보여준다. 여기에 더하여, 오랜 시간 대학에 몸담았던 교육자로서 진지하고 치열하게 음악창작에 접근하는 태도와 작곡가로서 갖춰야 구체적인 기술을 제자들에게 깊이 심어주었던 역할도 빼놓을 없을 것이다.

그는 보수적이면서 진보적인, 패러독스의 작곡가다. 대단히 진보적이고 실험적이어 보이나 사실상 그가 사용하는 악기나 인성의 주법은 (전자음악을 제외하고는) 대개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것들이다. 작품구성방식이나 음악관은 동시대 가운데 가장 앞선 작곡가에 속했지만, 그러한 구조와 음향을 만드는데 사용된 개개의 재료는 전통적인 것들이었다. 그런가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차갑게 빛나는 이성과 특정문화권에 귀속되지 않는 보편성을 추구한 작품들에 조금도 덜하지 않게 그의 음악세계의 다른 축을 담당하는 작품들은-그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매우 한국적 색채가 강하거나 감성을 풍부히 자극하는 곡들이다. 이렇듯 악기들의 전통적 주법만을 사용하여 새로운 음향을 추구하며, 이성적인 창작태도를 주장하면서도 감성적인 대표작품들을 남긴 그의 이러한 역설적인 면모는 그의 창작세계에 방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균형을 유지하게 해주는 평형추였던 것으로 보인다.

올해 Studio2021 봄시즌의 초빙작곡가였던 소피아 구바이둘리나와 음악적 이상(理想) 그에 따른 음악적 결과물은 서로 전혀 다르지만-그 이상 다를 없을 만큼 다르지만-창작가로서 음악에 접근하는 치열한 태도, 순수한 예술의 세계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연마해가는 자세, 독창적이고 고유한 자신의 세계를 꿋꿋이 관철해나가는 단단한 정신, ‘창조’라는 말마저도 경제논리와 상업성 안에서 오용되는 21세기의 천박함 가운데 진정으로 창조적이며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한다는 점은 구바이둘리나와 강석희, 노장에게 있어 적잖이 통하는 측면으로 보인다. 아니 어쩌면, 예술의 길을 일생동안 처절할 만큼 진정으로 추구하여 마침내 일가(一家)를 이룬 모든 예술의 거장들에게서 발견할 있는 공통점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다음 세대를 잇는 우리가 보다 앞서 올곧은 발자취를 보여준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새로움을 향한 추구 또는 예술의 창작이라는 개념이 척박한 우리 사회와 문화에서 태어나 살아왔으나, 환경에 구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창작세계를 부단히 탐험해온 작곡가 강석희는 분명히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며, 여전히 청년과 같은 현역 작곡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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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정 은 (음악학자, 서울대학교 교수 ) 예술가의 ‘창작행위’,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작품’을 결정짓는 요소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현재 우리가 일컫는 ‘서양음악사’는 단순하게 말해 ‘작곡가와 작품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유럽의’ 고급예술—즉 대중음악이나 민속음악을 제외한 이른바 ‘클래식’—범주에 속하는 작곡가

음악은 천재의 산물인가? : 음악적 “천재”에 대한 미학적 단상 - 오희숙

오희숙 (음악학자, 서울대 작곡과 교수) “아름다운 예술은 천재의 산물이다”라는 칸트(I. Kant)의 말처럼 멋지고 감동적인 예술을 접할 때 우리는 한번쯤 “천재”를 생각하게 된다. 특히 음악에서는 수많은 천재들과 만나게 되는데, 모차르트는 우리가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음악적 천재의 한 예가 될 것이다: “모차르트의 존재는 일종의 필연이었을 것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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