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법적? - 최우정

최우정 (서울대학교 작곡과 교수)


우리는 “대위법적” 이라는 수식어를 종종 쓴다. 그런데 어떤 곡을, 또는 작품의 특정 부분을 일컬어 “대위법적이다” 라고 말할 그것은 무슨 뜻일까? 인벤션이나 푸가의 기술이 쓰였다는 얘긴가? 독립적인 성부들이 사용되었다는 뜻인가? 아니면 모방 기법이 사용되었다는 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성부들이 비슷한 형태로 서로 “받아 나오는” 모양을 띠고 있다는 말인가? 만일 어떤 부분에 대해 “다성적” 이라고 하면 것을 구태여 “대위법적” 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왜일까?


질문에 대한 답을 뒤로 하고 우선 “대위법” 이라는 개념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대위법” 영어로 하면 ‘counterpoint(이, 독, 등의 경우에도 비슷하므로 여기서는 가장 일반적인 언어인 영어의 예를 든다)’ 이고 어원은 라틴어인 ‘punctus contra punctum’ 이며 개념이 생긴 것은 14세기경, 수직적으로 대응하는, 그러니까 동시에 울리는 음의 관계를 지칭하기 위함이었다. 말하자면 음정관계를 지칭하기 위함인 것이다. Harvard Dictionary 에서는 그것을 “note against note”, 의미를 확대하여 “melody against melody” 번역하고 있다. 용례를 보면 한자어인 ‘대위법(對位法)’ 이라는 용어에 다분히 기법, 기술, 법칙, 원리 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에 반해 ‘counterpoint’ 영어는 어떤 기법이나 기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음악적 대상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음이 있다면 음에 수직적으로 대응하는 다른 하나의 자체가 바로 counterpoint 이며, 푸가에서도, 성부에서 응답이 이루어질 다른 성부에서 등장하는 대주제(counter theme)를 counterpoint 지칭한다.  


다음으로, ‘counterpoint’ 에서 ‘point’ 무엇인지 생각해 필요가 있다. 다시 Harvard Dictionary 예를 들자면 그 “point” 는 “melody” 확대 해석될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동기(motive)도 있고 하나의 화음일 수도, 하나의 분명한 음색적 단위로서 정의된 음층(音層, cluster)일 수도 있으며 또는 하나의 악기, 나아가 여러 공간으로 분할된 콘서트 홀의 공간이라는 의미로 확대될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경계가 뚜렷한, 명백히 구분되는 특질을 지닌 하나의 독립적인 음악적 개체일 경우 그것은 ‘counterpoint’ 의 ‘point’ 있고 여기에, 대위법 기술의 현대음악으로의, 본질적 차원에서의 적용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대위법’ 이란 한자어를 ‘counterpoint’ 라는 용어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빌어 이해할 그것은 동시에 울리는 음의 관계를 다루는 기법, 또는 기법적 원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나의 음과 다른 음이 동시에 울린다는 것은 그렇다면 음정, 화성의 문제이며, 따라서 수평적인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수직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그것은 ‘point’ 의미가 확대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대위법은 선율, 내지는 성부를 다루는가 아니면 화성을 다루는가? 질문을 통해 우리는 “다성적” 이라는 수식어와 “대위법적” 이라는 수식어의 본질적 차이를 파악할 있다. 너무나 단순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대위법과 관련된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렇듯 ‘point’ 의미가 얼마든지 확대 해석될 있음을 감안할 때, 결국 대위법이란, 음의 진행을 수평, 수직을 고려하면서, 그것도 평면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차원에서까지 컨트롤할 있는 기술이다. 그러나 일단 여기서는 가장 기본적인 진행의 차원에 논의를 국한시키자. 우선 수직적인 차원, 화성적 차원에 대해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대위법” 에서 수직적인 차원은 부차적이고, 화성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근대음악에서 빈번히 사용되었던 이른바 ‘linear harmony(선적 진행의 결과로서 생기는 다분히 우연적인 화성)’ 정도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선법이나 기능조성의 체계를 바탕으로 연습에서조차 “음이 맞는”, 설령 음이 맞다 하더라도 화성 진행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결코 방치되면 되는 것은, 수직적으로 “음이 맞” 않고 더구나 화성 진행이 논리성을 지니지 않으면 아무리 선율을 만들고 모방을 해도 곡이 내적인 구성(composition) 갖출 없는데, 구성이란 ‘음표(note)’ 라는 추상적이고 시각적인 기호가 아닌, 들리는 소리(sound), 그리고 들음을 통해 경험되는 소리들 간의 관계들, 특정한 의미를 지닌 네트워킹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전달되어야 하는 것은, 시각적 구성이 아니라 청각을 통해서만 경험될 있는 내적인 구성 의미이며 내적 구성의 개연성과 필연성을 획득하는 것에 바로 작곡 기술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적 구성을 위한 출발점, 바로 동시에 울리는 음, 다르게 말해 음이 동시에 울리는 하나의 음악적 사건에 주목함으로써 대위법은 시작된다. 그러니까 “counterpoint” 더해지면서 관계가 생기고 관계를 바탕으로 구성이 시작되는데, 관계란 다름아닌 화성(和聲)인 것이다. 화성에 대한 컨트롤의 필요성. 바로 대위법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서양음악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작 작품의 종류와 양식을 결정짓고 어법의 진화를 가져오는 것이 화성적 측면이라는 점은, 선적인 측면에 주된 관심이 놓이는 다성음악에서조차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음의 수평적인 진행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아니다. 수평적인 차원의 진행, 범위를 좁혀서 말하자면 ‘선율 구성’ 역시 작곡의 중요한 측면이다. 그런데 음이 수평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하면 우선 생겨나는 것이 무엇인가? 선율? 모티브? 병진행(竝進行), 사진행(斜進行) 등의 진행형들? 아니면 수평적 음정 관계? 의미도 모호한 선율성? 아니다. 가장 먼저 생기는 것은 리듬이다. 하나의 음가가 상대성을 띠게 되어 때부터는 리듬의 문제가 발생하고 이 ‘음’, 아니 정확히 말해 ‘음가(音價)’ 수평적 대응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리듬이 확립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선율은 이렇듯 어떤 질서를 바탕으로 음가들의 조직에 의해 구성된다(composed). 노래처럼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성부에 리듬이 있다는 것은 음에 부여된 음가(音價)들이 어떤 질서 내지는 체계 내에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그저 즉흥적으로 처리된 음형에,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음들에 ‘자유롭게’ 부여된 음가의 나열에다가 “리듬” 운운하는 것은 말이 된다. 그렇다고 먼저 작곡에 들어가기 이전에 패턴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즉흥적으로 성부를 내려가더라도 어차피 패턴의 흔적들은 희미하게라도 남아 있다. 문제는 그것을 작곡가 자신이 모르거나, 알고서도 게을러서 내버려두거나 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요소들을 찾아내어 명확한 패턴을 만들어 낸다면 수평적인 측면에서도 ‘구성’ 시작되는 것이고 말은 결국 그때서야 비로소 작곡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화성과 리듬이다. 일반적으로 선율이나 구조, 형식, 텍스처, 현대음악에 특히 많은 다이내믹 등의 표현기호는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화성과 리듬, 특히 리듬 중에서도 박절(拍節)의 문제는 들어서 느끼지 않고는 컨트롤될 없다. “대위법” 이라는 과목에서 보통 “좋은 선율” 만든다거나(아마도 Gesualdo 보다는 Palestrina 를, Monteverdi 보다는 Bach 주로 다루는 상황에서는), 모테트, 인벤션, 푸가 등을 쓴다거나 밖의 다성적 텍스처를 다루는 방법에 주로 집중하는데, 그것은 모두 화성과 리듬을 다룰 가능한 이야기다. “16세기 대위법” 이란 이름 하에, 17세기 사람인 Fux 가, 죽은 팔레스트리나와 수다 떠는 식으로 만든 대위법 연습을 기본으로 하는 수업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종별 연습을 보면 그것이 다름 아닌 화성과 리듬 연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이 지난 모테트, 인벤션, 푸가 등을 작곡하는데 역시 거기서도 중요한 것은 화성과 리듬이다. 어떤 학생의 과제가 낮은 점수를 받는다면 그것은 주제 구성이나 모방, 가사 내용의 음악적 표현 등을 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역시 의미가 모호한 “형식미”, “구성미” 등이 결여되어 있어서라기보다는 대개 화성과 리듬을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주해 보면 금방 안다. 그러니까 대위법 기술이 어려운 것은 오히려 화성과 리듬 때문이다. 대위법은 화성과 리듬을 다루는 기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위법은 어렵다. 성부가 다른 성부를 모방하면서도 성부 사이의 화성과 마디 내에서의 분할, 그리고 화성 진행까지 고려해야 하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마디를 갈라 화성적 리듬이 규칙적으로 분할될 있도록 만들어 놓고 위에 성부들을 “맞추어” 나갈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다성음악에서는 전체적으로 박절 구조는 하나인데 바탕 위에 놓인 성부들이 서로 다른 박절 구조를 지닐 때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부만 연주할 때와 여러 성부를 같이 연주할 때의 조성이 서로 다른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아래에 화성을 분석해 보면 동형진행이나 종지부분을 제외하고는 화성적 리듬이 불규칙하거나, 규칙적이라 하더라도 뒤로 당겨지거나 밀리기가 일쑤다. 바흐의 프랑스 조곡의 페이지들, 알망드(Allemande)들만 보아도 이는 쉽게 이해된다. 더구나 곡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성부의 수가 감소할수록 화성의 다중성은 증가하는데, 오히려 이로 인해 2성으로 곡에서는 서로 연접한 화성들 사이의 모호한 경계로 인한 화성적 리듬의 정체성(停滯性), 동형진행의 역동성, 그리고 종지부분에서의 명확한 완결성이 서로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phrase 가, 나아가 형식이 구성되어 나가는 묘미를 맛볼 있다. 어떤 작품이 “대위법적이다” 라고 있다면 이러한 측면까지도 컨트롤되어 있을 가능한 얘기다.


선법음악이든 기능조성음악이든 무조음악이든, 어떤 부분을 “대위법적” 으로 완성도 있게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무조음악에서 화성적인 측면은 자유롭게 상태에서 성부끼리 서로 “받아 나가” 하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먹기다. 그게 되냐고 말할 있지만, 나름대로 피해 다닌다고 헸는데 아무 이유 없이 장3화음이 갑자기 튀어나올 때는 대략 난감하다. 작곡가가 그걸 모를 때는 민망하다 못해 원망스럽고. 그러한 상황을 피하려면 차라리 모방이 이루어지는 부분에는 부분을 지배하는 음계나 음조직을, 그것도 귀찮다면 부분에 사용될 음들을 미리 정해 놓고 시작하는 최소한의 장치라도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느 페이지에서 성부 사이에 모방이 이루어진다고 하자. 페이지는 온음음계로 쓴다. 그러면 적어도 화성적 측면은 기본이라도 갖출 것이고 그럴 때 “대위법적” 이란 수식어를 그나마 있는 여지가 어디엔가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3화음이 우연적으로 갑자기 들린다는 사실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12음을 그냥 자유자재로 씀으로 인해, 선율의 모방이 몰고 가는 전형적인 진행의 힘, 역동성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역동성이란 화성진행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외형적으로 점점 음형이 복잡해지고 많은 성부들이 모방의 밀도를 높여가고, 게다가 속도도 변하고, crescendo 까지 붙여져 있는데 화성적인 측면은 그저 점점 cluster 되는 정도이거나 아니면 그냥 비슷한 색깔에 머물러 있는다면 그야말로 그런 이른바 “삽질” 없다. 그저 외형상 독립적인 성부들이 서로 비스무리하게 “모방” 나가는 정도이고 화성은 그냥 제멋대로 되어 있는 곳에다 “대위법적” 이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 가슴을 일이다. “다성적” 이라는 표현까지도 그런 부분에는 사치 중의 사치다.


때로 무조음악에서의 제한(constraint)은 오히려 너무 쉽다고 생각한다. 청각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적, 산술적인(arithmetic)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관념적, 산술적 제한이 부분적으로 포기되어도 작품에는 크게 문제가 생기는 반해 청각적 제한은 아무리 작은 하나라도 어기면 금방 표가 난다. 그러니 “무조” 라는 든든한 빽이 있어 수직적 측면, 그것도 ‘기능’ 이라는 족쇄를 풀기에 넉넉~하니 자유로움과 편안함이 얼마나 클까!


“대위법적” 이란 표현은 많은 경우 틀렸다. “대위법” 이란 용어는 단순히 독립된 성부들로 이루어진 조직, 인벤션이나 푸가 등의 기법, 또는 모방 기법 등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라 포괄적인 작곡법 기술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심도 있게 대위법을 공부하지 않으면, 또는 작품의 대위법적 측면에 대해 연구하지 않으면 “대위법적” 이란 수식어는 그저 성부들이 많거나, 낫다면 성부들이 독립되어 있거나, 그보다 낫다면 성부들이 서로 “받아 나오” 거나, 그나마 그보다도 조금 낫다면 성부들 간에 모방이 이루어지는 작품이나 부분을 지칭하는 용어 이상의 어떤 의미도 우리에게 아닐 것이다.


보통 대위법은 2학년 기말고사와 함께 인생에서 막을 내린다. 그러나 오히려 대위법은 소위 “18세기 대위법” 배운 이후에 일이 많은 과목이다. 대위법이 어느 정도 습득되느냐에 따라 이후 쓰는 작품의 기술적인 수준이 결정된다. 모든 작품은 “대위법적” 되어야 한다. 작품이 기술적으로 업그레이드되려면 대위법 기술은 시간이 지날수록 숙련되어야 한다. 결국 대위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작곡 예술의 근본적인 기술을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부터 습득하는 것이다.


Ockeghem은 성부마다 다른 ‘Tempus(=tempo)’를 두어 각각의 성부가 서로 다른 시간적 바탕위에 놓이도록 했다.여기서의 ‘Tempus’,즉 ‘tempo’란 물론 속도가 아니다. 어차피 일상에서의 tempo란 뜻은 속도가 아니라 시간, 넓게는 분위기란 뜻까지 포함하고 있으니까. 여하튼 시간이란 의미까지로 제한하자면, 이미 Stockhausen의 Zeitmasse는 옛날에 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오케겜은 서로 다른 시간을 가진 네 개의 성부 사이에 모방을 만들었고, 그 모방은 각자 다른 시간을 가지기 때문에 어떤 것은 원래것보다 늘어나 있고 어떤 것은 줄어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다가 수직적으로도 화성까지 제대로 “맞추어” 놓았으니 비록 악보는 훨씬 단순하지만 어찌 Zeitmasse보다 쉽고 간단하다고 할수 있으랴. 게다가 성부가 서로 다른 시간적 바탕위에 놓여있다는 사실이 각 성부의 분명한 독립성과 서로간의 모방적 관계로 인해 확실하게 인식되고 있으니,이는 곧 각 성부가 서로 다른 시간을 가지는 네 개의 다른 공간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이고, 이를 더 명백히 하기위해 네 성부를 각각 콘서트홀의 서로 다른 곳에 거리를 두고배치한다면, 이는 예의 “point”의 의미가 물리적 공간으로까지 확대되었을때 가능한 이른바 20세기 후반의 작곡기법중의 하나인 ‘공간대위법’의 차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오케겜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못했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이미 연대기적(年代記的, chronological)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운 작곡 예술의 정수를 맛보기도전에 우리는  3학년만 되면 현대음악이니 하면서 어느새 슈톡하우젠 이후로 넘어가 음형 등의 겉모양이나 흉내내느라 그 이후부터 전혀 “대위법적”인 곡을 쓰지않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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